A24라는 이름은 이제 단순한 영화 제작사를 넘어 하나의 장르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유전', '미드소마', '톡 투 미' 등을 통해 호러 명가로 자리매김한 A24가 이번에는 휴 그랜트와 함께 '헤레틱'을 선보였습니다. 종교적 담론을 끌어오며 머리와 심장을 동시에 긴장과 공포로 물들인 이 작품은 A24와 휴 그랜트의 진가를 재증명하고 있습니다.
휴 그랜트의 연기 변신: 로맨스 장인에서 공포의 화신으로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노팅 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등을 통해 로맨스 장인으로 불리던 휴 그랜트가 '헤레틱'에서 보여준 연기 변신은 충격적입니다. 그는 차분해서 오히려 더 무서운 캐릭터 리드를 연기하며 강렬한 존재감을 선보였습니다.
특히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매력이 오히려 영화에서 긴장과 공포를 자아내는 요소가 됐습니다. 맹목적인 믿음에 휩싸인 노인으로 변신한 그랜트는 신을 섬기는 두 여자보다 신을 믿지 않는 리드가 더 광신도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연기로 그는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 영국 아카데미, 크리틱스 초이스 등에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영화의 주요 테마: 믿음의 본질과 호접지몽
'헤레틱'은 제목처럼 종교적인 담론을 꺼내며 '믿음'의 본질을 다룹니다. 영화는 크게 리드의 거실, 예배당처럼 보이는 서재, 지하 공간으로 옮겨가며 이야기가 진행되고, 분위기도 미스터리 심리 스릴러에서 피가 흐르는 호러로 변화합니다.
초반부는 종교와 믿음에 관한 철학적인 담론으로 이어집니다. 유일한 참된 종교란 무엇인가, 진짜 믿을 수 있는 교리란 무엇인가 등 인류가 오랜 시간 품어왔던 질문과 의문을 리드의 입을 통해 쏟아냅니다. 흥미롭게도 리드는 모노폴리라는 게임을 이용해 종교를 설명합니다. 가장 최초의 원형이 된 게임과 이를 변형해 생겨난 모노폴리, 그리고 여러 버전으로 나온 모노폴리를 성서와 비교하는 것입니다.
영화의 결말에서는 장자의 '호접지몽'을 언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인 내가 나비 꿈을 꾸고 있는가? 나비인 내가 사람이 된 꿈을 꾸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영화의 엔딩과 연결되어 흥미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스콧 벡과 브라이언 우즈: 공포 장르의 새로운 거장들
'헤레틱'을 연출한 스콧 벡과 브라이언 우즈 감독은 꾸준히 공동 각본·연출을 이어가고 있는 듀오입니다. 이들은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각본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으며, '65' 등의 작품도 제작했습니다.
다르덴 형제, 코엔 형제, 워쇼스키 자매처럼 혈연관계로 함께 연출하는 경우가 보편적인 것과 달리, 이 둘의 꾸준한 협연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례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헤레틱'은 이들의 전작보다 훨씬 묵직하고 섬세한 느낌을 주며, 공포뿐 아니라 드라마적 관점에서도 충분히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종교적 논쟁: 믿음과 불신 사이의 게임
'헤레틱'에서 종교적 논쟁은 일종의 '게임'으로 전개됩니다. 두 여성이 가진 종교에 대한 믿음을 뒤흔든 리드는 두 사람에게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선택할 것을 강요합니다. 종교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인데, 반스와 팩스턴이 선교를 위해 리드의 집을 찾은 순간부터 믿음의 본질에 관한 리드의 시험, 즉 게임은 시작됩니다.
두 사람은 리드의 말만 듣고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할 거라 믿지만, 애초에 리드가 말한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물론 관객까지 과연 무엇을 어떻게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 의심을 품게 됩니다. '헤레틱'에서 의심은 곧 '공포'입니다.
리드는 스스로 종교의 신처럼 반스와 팩스턴의 종교를 변형하고 믿음을 흔들며 통제하려 합니다. 이 과정은 마치 맨스플레인과 같습니다. 리드는 맨스플레인을 통해 두 여성을 정신적, 물리적으로 통제한 후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게임을 진행합니다. 그러나 결국 리드가 흔들려고 했던 믿음도, 그가 행하려고 했던 통제를 두 여성은 벗어났다는 점은 여러모로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A24의 '엘리베이티드 호러' 스타일
'엘리베이티드 호러'(elevated horror)라는 용어는 A24가 제작한 호러영화들을 지칭하기 위해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호러영화의 자극을 기대하고 온 관객에게 이 영화들이 생각보다 '무섭지' 않다는 변명처럼 사용됩니다. 적어도 장르적으로 무섭지는 않지만, 대중이 생각하는 호러영화의 기대와는 상관없는 매력과 장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A24의 호러영화들은 모두 지난 몇십 년 동안 숱한 선배들이 다지고 쌓은 영토 위에 있지만, A24는 일반적으로 쉽게 무시되거나 주저하며 접근하지 못했던 이 영토에 속한 영화들에 안정된 제작 환경과 고정된 관객을 제공했습니다.
'헤레틱'은 이러한 A24의 '엘리베이티드 호러' 스타일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종교적 담론과 철학적 질문을 통해 더 깊은 차원의 공포를 선사합니다. 정정훈 촬영감독의 특유의 스타일로 한정된 공간을 두렵고 긴장감 가득한 분위기로 채워 넣은 점도 영화의 큰 장점입니다.
'헤레틱'을 보고 나면 휴 그랜트의 다른 영화들과 블루베리 파이를 마냥 이전처럼 바라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번 작품은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A24의 호러 명가로서의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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